영화 '버닝'은 아주 뛰어나고 무척 훌륭한 영화이다.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여백과 모호한 태도, 롱테이크와 주술적 표현과 다소 소설적인 대사들이 한 번의 감상으로는 온전한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을 이 영화에는 아주 세세한 디테일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한 번만 보고는 이해가 쉽지 않다. 영화를 한번 보고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기억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상 놓치는 장면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무산 계급의 종수가 만난 혜미
일단 영화는 종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수는 전형적인 리틀 헝거이다. 가난한 무산 계급의 남자이다. 종수가 만난 것은 혜미이다. 혜미는 말하자면 리틀 헝거이지만 그레이트 헝거가 되려는 여자이다. 그리고 혜미에게는 갈급이 있다. 혜미는 종수의 사랑을 갈구한다. 혜미가 종수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은 영화에 명확히 드러난다. 아무리 영화라고는 해도, 그리고 어린 시절에 알고 지내던 소꿉친구라고 해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몸을 섞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즉 영화의 혜미는 무척 능동적이고 무척 큰 욕망과 갈급을 지니고 있으면서 무척 허망하고 철없는 여자이다. 혜미는 내레이터 걸 알바를 하면서 카드 빚에 허덕이고 돈도 없고 작고 허름한 방,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서울의 상징 남산 타워에서 반사되는 반쪽자리 빛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혜미가 겨우 바라보는 빛조차 반쪽짜리라는 것은 참 야속하다. 하지만 그것이 혜미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혜미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려고 한다. 그 욕망이 향하는 것은 허무함이다. 혜미는 어떻게 해야 그레이트 헝거가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걸 찾기 위해 해외여행을 한다. 돈도 없고 가난한 젊은 여자가 선택한 것은 해외여행이고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혜미가 보여주는 팬터마임은 하나의 비유, 메타포이다. 매트릭스와도 같은 것이다. 애초에 귤이 없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즉 진실과 허상의 경계를 느슨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영화는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확신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에서 잊음으로써 그것은 진실이 된다. 마치 혜미는 귤을 지니지 않았지만 혜미는 맛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혜미가 벤을 데려오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종수는 매일 혜미의 집에 찾아가서 보이지 않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혼자서 그 행위를 한다. 이 부분을 조금 더 리얼하게 생각해 보면 감독이 잔인하게 묘사하고 있다. 종수는 소설을 쓰는데 이 영화에서 소설은 마치 귤, 그리고 고양이 보일이와 같은 것이다. 영화에서 종수가 글을 쓰는 것이 직접 나온 것은 오직 탄원서뿐이다. 즉 종수는 현실적인 글은 쓸 수 있지만 그 자체로 허상이고 예술인 소설은 쓰지 못한다. 종수는 그레이트 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종수가 혜미의 집에서 쓰는 글조차 소설이라는 확신이 없어진다. 이 영화에서는 종수의 소설 또한 하나의 맥거핀이고 종수의 소설은 종수의 화장에 불과하다. 이것은 혜미의 성형수술과 혜미의 해외여행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렇기에 종수는 벤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벤은 그레이트 헝거이다. 그렇기에 벤은 종수와 전혀 다른 인생을 산다. 이창동 감독이 잔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다. 종수는 분명 살기 위해 음식을 만든다. 자취 음식이며 그것을 만들고 먹는다. 티브이가 틀어져 있고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는다. 이게 리틀 헝거의 섭취이고 요리이다. 즉, 종수에게 요리라는 것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생존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벤이 만드는 요리는 생존과 생활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기에 종수는 이것이 익숙하지 않다.
현실은 종수, 그녀가 바라는 이상은 벤
하지만 혜미의 삶의 공간은 리틀 헝거의 삶과 같다. 하지만 혜미가 바라보는 것은 그레이트 헝거의 삶이다. 그렇기에 벤의 파스타를 바라보는 종수와 혜미의 시선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종수가 파스타를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면 혜미는 파스타를 경외심을 품고 바라본다. 하지만 혜미가 그레이트 헝거들 앞에서 춤을 출 때 혜미의 본질이 드러난다. 리틀 헝거의 춤을 보여주고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 위해 펼치는 그녀의 춤은 우스꽝스럽다. 그 간절함, 리틀 헝거에서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 위한 간절함은 비웃음으로 치환된다. 그녀는 허망한 가당치도 않은 희망을 품었고 비웃음은 수치스럽고 부끄럽다. 벤은 그런 혜미의 모습을 보며 비웃는다. 혜미의 가난조차 벤에게는 하나의 흥미로운 요소일 뿐이다. 그리고 리틀 헝거인 종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문제는 종수이다. 종수에게는 아버지가 있는데 자존심을 지닌 리틀 헝거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보여준다. 종수의 자존심은 소설이며 종수는 아버지와 같다. 물류 창고로 알바를 하러 가는 것은 리틀 헝거로서의 결정이지만 뛰쳐나오는 것은 자존심이다. 아버지가 살아가는 농장과 송아지 한 마리는 아버지와 종수의 리틀 헝거와 같은 삶이고 아버지가 숨겨놓은 칼은 리틀 헝거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며 무기이다. 바로 리틀 헝거의 공격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포크너적인 분노이다. 한편, 벤의 무기는무엇인가. 바로 벤의 화장실에서 나온 화장품과 액세서리이다. 리틀 헝거는 칼로 자신을 무장하고 남을 찌르는 것만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지만 벤에게는 얼굴을 꾸미는 것이 수단이고 액세서리는 그런 삶의 의미를 보전하는 전리품인 셈이다. 종수는 혜미에게 사랑을 느낀다. 종수와 같은 리틀 헝거에게 있어서 혜미라는 여자는 어려운 일이고 쉽지 않은 접근이다. 종수가 혜미와의 관계에서 능숙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렇게 포르셰를 태워서 혜미를 보내는 종수의 모습에서 가슴이 서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수는 혜미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이고 애착을 느낀다. 종수는 혜미의 집이 좋다. 같은 부류의 낯익음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혜미가 종수의 집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춘 것은 종수를 향한 구애라고 생가들 수 있다. 옷을 벗고 춤추는 것은 주술적인 의미가 있고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 위한 그녀의 하찮은 욕망의 낯 뜨거운 발현이라고 봐야겠지만 그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종수와 벤, 둘 다이다.
벤을 비추는 인조광과 종수를 보여주는 자연광
하지만 종수는 벤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혜미에게는 쉬운 여자라고 말한다. 벤에게는 혜미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벤은 그런 종수를 비웃어 버린다. 벤의 사랑과 애착 역시 가볍지만 혜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종수의 감정 역시 얕다. 그리고 혜미에게 쉬운 여자라고 말한 종수는 이후 혜미를 만나지 못한다. 벤은 자신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말한다. 이 역시 일종의 팬터마임이다. 진짜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지 아니면 메타포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종수는 매일 비닐하우스를 보러 다닌다. 벤을 이해할 수 없는 리틀 헝거이기 때문이다. 리틀 헝거의 방식으로 힘들게 벤을 쫓는 종수는 결국 혜미를 놓치고 만다. 혜미는 우물에 빠진 경험을 말한다. 그리고 혜미의 가족도 이장도 우물은 없었다고 말한다. 비닐하우스는 타지 않았다.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웠다고 혜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은 것 아니냐고 묻는다. 혜미는 종수에게 우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달라고 말한 것이지만 종수는 바로 옆에 있는 혜미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 혜미가 아닌 벤을 바라보고 혜미의 방에서 남산 타워를 본 것처럼 말이다. 이제 종수의 분노는 벤을 향한다. 벤을 향한 종수의 분노가 점차 실체화되기 시작한다. 종순은 잊기 시작한 것이다. 벤의 행위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잊는다. 그러자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혜미의 시계는 혜미가 선물한 것일 수도 있다. 고양이 보일이는 진짜 보일이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종수는 이미 그런 것은 잊어버린다. 마지막으로 벤의 새로운 여자 친구 역시 리틀 헝거로서 그레이트 헝거들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자 종수는 이제 자신이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로 작정한다. 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마치 혜미의 우스꽝스럽고 부질없는 춤사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레이트 헝거처럼 불태우는 것이다. 버닝이고 살인이다. 그것이 리틀 헝거 종수가 이해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이었다. 영화를 보는 사람마다 해석은 다르겠지만 영화의 완성도는 참으로 높았다고 생각한다. 연출면에서 좋았던 점은 벤을 보여줄 때는 인조광을 종수를 보여줄 때는 자연광을 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어두운 장면들이 많은데 자연광을 써서 그런 것 같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지만 영화를 몇 번 더 봐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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